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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페라도, 이건 어때? 아까 전 것 보다 나은가?”

“…둘 다 잘 어울린다만”

“아, 정말! 좀 제대로 보고 대답해주면 어디 덧나?”

 

벌써 7벌 째 입어본 네가 할 소리는 아니지 않냐. 나는 후환이 두려워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억지로 집어삼켰다.

‘어떻게 대답이 다 잘 어울린다 뿐이야?’ ‘누가 보면 로봇인 줄 알겠네’ ‘적어도 뭐가 더 나은지는 말해 줄 수도 있잖아?’ 다 들리는 말을 중얼거리며 거울 앞을 기웃거리는 루엔은 제 눈동자와 비슷한 색의 치마를 이리 저리 살펴보았다. ‘역시 이게 나으려나?’ 제법 진지한 혼잣말은 내 대답을 필요로 하는 것 같지 않았다.

무릎 조금 위 길이의 치마는 얼마나 좋은 옷감으로 만든 것인지 멀리서 봐도 광택이 난다. 물론 고급인 것은 치마뿐만이 아니지. 연보라 색 저고리도, 거기 달린 노리개도, 신고 있는 비단신까지 모두 비싸 보이는 것뿐이다. 무법지대에선 구경도 못해본 것이니 들뜰 만도 하지. 이해는 하지만, 나보고 뭐라고 할 건 없잖아?

나는 쌓인 한들을 한숨으로 토해내고 루엔에게 다가갔다.

 

“그래서, 그걸로 결정?”

“음… 네가 보기엔 어때? 이게 좋아?”

“넌 뭘 입어도 예뻐”

“…아니, 그런 대답을 바란 건 아니니까!!”

 

말은 저렇게 하면서도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었다. 하여간, 이 녀석은 표정이 솔직해서 귀엽단 말이지. 물론 이럴 때 귀엽다는 말을 했다간 ‘안 귀여워’라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니 굳이 말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네가 입을 거니 네가 마음에 드는 걸로 고르면 되는 거 아냐? 내 의견보단, 네 의견이 중요하지”

“그건 그렇지만, 이것도 저것도 다 괜찮아 보이니까 너한테 묻는 거라고”

“나도 그렇다만”

“……”

 

반박할 말이 없는 걸까. 허무한 표정으로 날 보던 루엔이 다시 거울로 시선을 돌렸다. ‘으음’ 앓는 소리를 내며 이제까지 입었던 옷과 지금 자신을 비교해 보는 루엔의 얼굴은 진지했다. 그렇게 고민할 일인가. 빈 말이 아니라, 정말로 다 잘 어울리는데. 딱히 내 애인이라서 콩깍지가 껴서 그렇다던가 하는 게 아니다. 녀석은 키도 크고 다리도 기니까, 뭘 입어도 중간 이상은 간단 말이다. 그러니 그만 좀 고민하고 슬슬 아무거나 골랐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황녀님도 정말 통이 커~ 새해 선물로 새 옷을 사준다고 하더니 이렇게 고급 포목점에 데려와 주시고~”

“정확하게는 황도군 녀석들이 데려와 준 거지만”

“아니 그럼 천계의 군주가 막 나돌아 다닐 순 없잖아? 그런데 데스페라도는 안 골라?”

“난 됐어. 너 두 벌 골라라”

“신난다!”

 

루엔은 그 말을 듣더니 어린애처럼 웃었다. 그래, 저렇게 기뻐해 준다면 양보하는 보람이 있지. 어차피 황실에서 주는 선물 같은 건 관심도 없지만 말이다.

‘두 사람, 새해 복 많이 받게나’ 그런 문장으로 시작되는 연하장이 우리가 있는 무법지대로 온 것은 새해가 되고 이틀 정도 지났을 때였다. 아무리 황도군을 도와 카르텔을 처리하고 다녔고 란제루스의 목숨을 끊은 게 우리라 해도, 설마 오지에 있는 무법자들에게까지 신경을 쓸 줄은 몰랐는데. 연하장은 그 존재 자체도 놀라웠지만, 안에 적힌 내용은 더 놀라웠다. ‘그대들이 내 목숨을 구해준 은혜는 언제나 감사히 여기고 있네’ ‘그래서 말인데, 내가 새 옷을 선물해 주고 싶으니 가까운 시일 내로 겐트로 와 주지 않겠나?’ 거기까지 읽은 루엔은 두 눈을 빛내며 짐을 챙겼고, 내 팔을 잡아당겼다.

 

“당장 가자, 데스페라도!!”

“…너, 의욕이 넘친다?”

“그거야 황실에서 주는 옷이라고? 엄청 좋고 비싼 옷일 거 아냐? 이런 건 챙겨둬야지!”

“허…”

 

물론 공짜를 거절 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지만, 저렇게 들뜰 일인가. 그때는 별일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갔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쩌면 루엔은 공짜로 고급 옷을 받는다는 것 보다 평소 입어보지 못하는 옷을 입는다는 것에 들뜬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법지대의 복식과 여기의 복식은 완전히 다르니까. 늘 와이셔츠에 코트만 입고 다니던 그녀에겐 한복을 입어보는 게 색다른 자극이었겠지. 난 굳이 따지자면 편한 게 좋으니, 한복은 관심 없지만 말이다.

 

“좋아, 그럼 이거랑 이걸로 결정!”

“…두 개 골라도 되니 의외로 빨리 선택한다, 너?”

“뭐, 아무래도 포기해야 하는 게 하나 더 줄어드니 그렇지 않을까. 제일 마음에 드는 거 하나 고르는 건 어려워도, 마음에 드는 것 후보 중 두 개를 남기긴 쉬우니까”

“그래, 어찌됐든 빨리 달라고 하고 나가자. 답답해 죽겠네”

 

사방이 옷인 건 상관없다만, 담배를 못 피우는 건 내게 고문과 같다. ‘네, 네’ 내 표정을 보며 소리죽여 웃은 그녀는 고른 옷을 들고 가게 주인에게 갔다.

드디어 이 지겨운 쇼핑도 끝인가. 속으로 만세를 부른 나는 밖에서 기다리는 황도군 녀석들을 슬쩍 보았다. 저 녀석들, 아까 전부터 루엔이 새 옷을 입고 나올 때 마다 힐끔힐끔 보던데, 가볍게 한 대씩만 쳐주고 와도 될까. 아무리 예뻐도 남의 여자를 무슨 구경거리 보듯 보면 패주고 싶단 말이지. 이건 딱히 내가 예민하게 구는 게 아닐 거다. 분명 반대의 상황이었으면 루엔도 이렇게 생각 했을 거라고.

 

“자, 가자!”

“잠깐. 그대로 입고 가냐?”

“응? 응. 황녀님께 뭘 샀는지는 보여줘야 할 거 아냐?”

“……”

 

어쩔 수 없지. 밖의 녀석들, 가는 동안 한번만 더 힐끔힐끔 보면 눈을 한번 씩만 찔러주자. 진심으로 그리 결심한 나는 이쪽을 보고있는 황도군 녀석들에게 ‘허튼 짓 하면 죽여버린다’라고 눈빛으로 이야기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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