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 조선 AU

* 오리주 (에 대한 언급) 주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초생달 두리둥실 떠오른 밤. 곧 인정人定이 되어 대종이 울릴 터인데, 순흥 안 씨 죽성공파 삼대 독자 안 진사는 이 늦은 시간에 어딜 그리도 급히 가는가. 어둠에 삼켜져 개미 새끼 하나 없는 한산한 저잣거리 지나, 크고 작은 담장들 만수산 드렁칡 얽혀진 듯 오밀조밀 모여 있는 골목으로 향한다. 담 너머로 순찰관의 횃불이라도 보일까 이리 빼꼼 저리 빼꼼. 혹 비밀스레 연모하는 의중지인意中之人과의 해후라도 고대하는 겐지. 한참을 서성이며 목 빠지게 기다리자니 일각여삼추一刻如三秋, 일각이 삼 년과도 같구나.

 

공의 모습을 보자니 남성치고는 꽤 단아한 풍채로다. 매화 꽃잎 같은 백옥색 피부에 눈썹은 짙고 코는 오똑하다. 눈은 양옆으로 길쭉하며 굴곡진 입술은 쥐라도 잡아먹은 듯 불그스름하니, 뭇 젊은이들 마음을 수십수백 번은 훔쳤을 법한 용모렷다. 큰 키에 팔이며 다리는 모조리 비쩍 말랐고 허리는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낭창하니, 이는 평생을 골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었을 법한 모양새가 아니련가. 대를 띠고 혜를 신고, 흑요석 같은 머릿결을 한데 모아 가지런히 상투를 올리고, 그 위에는 새로 맞춘 흑립에 옥으로 장식된 갓끈이라. 비단으로 만든 도포는 맑게 개인 한낮 하늘을 닮은 빛깔이며, 그 소매 폭은 어찌나 넓은지 커다란 돌멩이를 집어넣어도 익히 들어갈 듯 하니 진풍경이라. 허나 그 청아한 푸른빛도, 우아한 옷맵시도 지금은 어둠 속에 묻혀 통 보이지 않으니 안타깝기 그지없구나.

안 대사헌 댁 아드님으로 말하자면, 하나를 배우면 열을 깨우치고 열을 알면 백을 깨닫는다는 그 총명함에 대한 소문이 온 도성에 자자하며, 이미 다섯 살에 천자문을 떼고 일곱 살에 이미 사서와 삼경을 독파하니 진정 하늘이 내린 인재일지어다. 내로라 하는 문장가들도 혀를 내두를 만한 명문을 지어올려, 불과 열 아홉 나이에 홍패 차고 어사화를 꽂고 한양 도성을 행진하였으니 첫 과거에서 장원 급제요. 이는 가문의 경사로다. 허나 곧 관복을 입고 벼슬길에 나아갈 자가 어찌 이 늦은 시간에 이리도 괴이한 행동을 하는가.

 

스리슬쩍 나타나 동동 떠다니며 밤하늘 노닐던 구름조각이 달을 잠시 삼키었을 때, 반대편 골목서 다급한 발소리 들리더니 이내 인영 하나 불쑥 튀어나오는구나. 안 진사 깜짝 놀라 벌렁벌렁 뛰는 가슴 부여잡으며 제 앞으로 다가온 이를 슬쩍 보니, 다행스럽게도 도깨비도 귀신도 아니요 그냥 평범한 사람일지어다. 옷차림으로 미루어보자니 뉘 집 댁 하인임이 분명하건만 어인 일로 이 시간에 싸돌아다니는 게야, 라며 안 진사가 채 꾸짖기도 전에 인영은 코웃음을 치며, 가지고 있던 꾸러미 하나를 던지듯 건네준다.

우리 아씨께서 전해 달라 하셨소. 발걸음을 돌려 다시 어둠 속으로 향하기 전, 그 무례하기 짝이 없는 하인이 퉁명스레 말을 던진다. 최대한 남의 눈에 띄지 않게 공께 이것을 가져다달라던데, 그리 하려면 이 늦은 밤에 약속을 잡을 수밖에 없었소이다.

 

저런 버릇없는 놈이 다 있나. 달리 대꾸할 시간도 주지 않고 금세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종놈을 보자하니 헛웃음까지 나온다. 서둘러 집에 돌아와 제 방 책상 앞에 앉은 안 진사 황급히 보따리를 풀어보니, 안에 든 것은 그의 도포 빛깔과 꼭 닮은 옥색 비단이다. 아니나 다를까 비단에 고이 담긴 것은 곱고 고운 필체로 쓰여진 한시렷다.

 

精金明月珠

贈君爲雜佩

不惜棄道旁

莫結新人帶

아름다운 금덩이 빛나는 진주로

노리개 만들어 그대에게 드리오.

길가에 버리는 건 아까울 게 없지만

새 여자 허리에 매어 주지는 마시오.

 

한 겹 더 풀어내자 언문 글귀가 있었다.

 

보름 전의 만남은 무척 즐거웠소.

진주로 된 노리개를 기대했다면 유감일 터이지만, 그대의 옷을 쏙 빼닮은 천이 있어 내심 신기한 마음이 들었기에 한번 가져와보았소. 마음으로 글을 만들어, 그대를 닮은 비단 한 조각과 함께 보내오. 이리도 야심한 밤에 서찰을 주고받자니 걱정이 태반이지만, 믿을 만한 아이 편에 보내니 무사히 그대에게 닿을 수 있을 거요. 사람을 대하는 것이 매우 무례하지만, 총명한 아이이니 부디 너그러이 받아들이시오.

 

-당돌한 여인네였다.

무어라 답신을 하여야 할까. 이 비밀스런 만남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안 진사는 다시금 웃음을 흘렸다. 자조적인 헛웃음이 아닌, 비단에 담긴 서찰의 고운 서체를 쏙 빼닮은, 해사한 웃음이었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