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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사시,(巳時, 09부터 11시 경) 그녀와 내가 처음 만난 시각이었다. 검은 밤, 붉은 너울을 쓰고는 앉아 있는 여인은, 뒷모습 밖에 보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움과 기품이 흘렀다. 어딘가 서글퍼 보이는 여인은 축축한 물방울을 연상시키기도 하였고, 붉은 너울 새로 보이는 내려묶은 검은 머리칼은 우아한 흑색의 보석 같았다. 다홍치마에 상아색 저고리, 짙은 보랏빛치마에 흰 저고리. 날마다 바뀌는 옷차림새에도 붉은 너울은 언제나 쓰고 다녔다. 하루도 빠짐없이 강가 정자에 앉아있는 여인은, 한 치의 미동도 없이 강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때때로 그 정자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시조를 짓기도 하였다. 날마다 그곳에 가 여인을 바라본 것은, 아마 아름다움에 취했기 때문일 것이다. 라 생각 하였다. 다채로운 옷감의 색을 보면 웬만한 부잣집 아씨들을 능가하였기 때문이다. 뭐 하나 특출한 것 없는, 그저 시골의 서당에 다니는 자신은 범접할 수 없다. 라며 피어오르는 연심을 누르고, 또 눌렀다.

 

여느 때처럼 강가의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떨기 붉은 꽃 같은 여인은 언제 바라보아도 질리지를 않았다. 그러나 그가 연심을 깨닫게 된 연유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시작된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벼허내어

춘풍 니불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 뎌든 구뷔구뷔 펴리라“

자그마한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목청은, 강가의 물과 나의 귀로 흘러들어가 잠겨버렸다. 일전 다녀갔던 기녀가, 한양에서 제일가는 기녀의 시라며 일러준 시조였으리라. 옥구슬 굴러가듯 맑고 청아한 목소리는, 순간 나의 마음을 빼앗았으며, 그 여인과 더욱 이야기하고 싶었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더욱 듣고 싶었다. 쌀쌀한 가을바람이 나뭇잎들을 떨어뜨렸고, 그와 함께 목숨도 떨어질 뻔하였다. 어디에선가 날아온 날카로운 쇠붙이. 앞을 바라보자 보이는 붉은 너울과 숨 막히게 아름다운 미소는, 그 얼굴만으로 목숨을 앗아갈 것만 같았다. 장검을 그대로 바닥에 꽂아버릴 정도의 힘이라면 어느 정도일까. 라는 생각들이 뇌리를 스쳐지나가고, 여전히 환한 눈웃음을 짓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어지러움을 증가시킬 뿐이었다.

 

“나를 훔쳐보고 있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소. 흐음. 야마자키 사가루였었나.”

“에, 예. 맞습니.. 아니, 훔쳐봤다는 것은 아니오나..”

“나는, 요압 기와집의 무남독녀, 호시노 유메라고 한다만.”

이름을 들은 순간 그의 낯빛이 바뀌었다. 그곳은, 일본에서 아름답기로 소문난 여인과 혼인하였다던 홍대감댁이었다. 자신의 하나뿐인 딸을 걱정한 나머지 무도(武道)를 가르쳤다는, 소문으로만 들 리우는 여인이었다. 건드릴 만한 상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부잣집 자제에, 무와 문에 모두 능해 타국으로 갔다가 이번 봄 돌아왔다는 여인이, 이름만 들어보았던. 소문으로만 익히 들었던 ‘호시노 유메’였다.

 

“나는 이곳을 굉장히 좋아해. 잔잔한 물살하며, 아름다운 정자. 빼곡히 들어선 나무들. 가장 좋아하던 장소였다만.”

“다, 다시는 오지 않겠습니다. 저는 그저, 그저.”

“왜, 내가 그대를 죽이기라도 할 것 같은 것인가? 굳이 피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마침 말벗이 필요하던 찰나인데, 해 보겠느냐?”

뜻밖의 말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까 전 시조를 읊을 때와는 사뭇 다른, 가볍고 발랄한 목소리였다. 번쩍, 빛을 내며 붉은 자수가 놓인 칼집으로 들어가는 장검은, 오금을 저리게 할 정도로 빛났다. 이때에 이 제안을 수락한 것은 무슨 용기였을까. 아직까지도 사가루는 알지 못 하였다. 어디에서 솟아오른 용기인지.

 

****

 

“오늘은, 오키타씨가 히지카타씨를..”

“흐음, 그 오키타.라는 자는 항상 누군가를 죽이려 드는거냐”

“아니요, 히지카타씨 한정이랄까. 그래도 두 분의 유대는 강력하답니다. 그 누구도 끊어 놓을 수 없어요. 아, 오키타씨의 누이인 미츠바씨도 그 분들과 굉장히 친하시죠. 요즘 병색이 짙어지셔서 걱정이기는 하지만..”

“그런 유대도 있는 것인가. 신기한 유대관계 이군.”

“그렇죠, 볼 때마다 신기하답니다. 싸우다가도 설 챙겨주고, 그러는 분들이에요.”

사가루의 머리칼을 매만지며 말했다. 머리카락이 부드러워 마음에 든다며 자주 매만지곤 했었다.

 

“그, 호시노씨. 그 너울을 벗어주실 수는 없는 것입니까?”

“아, 내 얼굴이 궁금한 것인가.”

“내내 형상만 보이다 보니, 조금 궁금해 져서요.”

“그렇게 궁금하다면야, 할 수 없네.”

선심 쓴다는 듯이 말하는 말투. 사가루는 기대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자신의 머리칼을 몇 번이고 매만졌던 길고 수려한 손가락이 너울을 스치고, 조금 느릿하게 너울을 떼어냈다.

 

“어때, 기대이상?”

차분하게 내려묶은 흑단 같은 머리칼에, 붉은 빛이 도는 적안(赤眼). 창백하다 느껴질 정도로 흰 피부, 붉은 동백꽃을 연상시키는 입술은 다홍색 치마와 이상하리 만치 잘 어울렸다. 일전 다녀갔던 미모의 기녀보다도 예쁘다 느껴지는 여인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렇게 까지 아름다운 여성을 본적이 없었다. 자신이 본 여인들중 가장 어여쁜 여인 이라 말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아름다우십니다. 무척이나. 제가 보아온 여인들 중 가장 아름답습니다.”

넋이 나간 듯한, 약간 붕뜬 목소리로 입을 떼어 말하는 사가루의 모습은 영락없는, 사랑에 빠진 사람의 표정이었다. 이제껏 여인에게 연심을 품고 있었고, 애써 부정할 뿐이었던 것이었다. 목소리, 손가락,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은 여지것 본 어느 것보다 아름다웠으며, 사랑스러웠다.

 

“오랫동안 연심을 품어왔습니다, 호시노씨. 저의 정인(情人)이 되어 주시겠습니까.”

밝은 달이 비추는 강물 앞, 자신의 마음을 차분히 전한다. 격차를 좁히기에는 자신이 모자라다는 사실도, 성사될 리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기분나빠하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을 수도 있었고, 다시는 그녀를 보지 못할 것이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마음을 전한다. 자신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큰 사랑이었기에, 흘러넘치고 넘쳐 더 이상 감당이 안 되는 마음이었으며, 너무나도 쓰라린 고통이었기에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누가 누구의 정인이 된다. 그러냐.”

일전 시조를 읊었던 순간과 같은 목청이었다. 아름답고도 축축한 슬픔이 담긴 그런 소리. 자신이 연심을 품었던 그 목소리. 이럴 줄 알았잖아, 라 생각하며 애써 감정을 억제하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기어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곤란하게 만들었잖아. 멍청한 놈. 온갖 욕지거리들을 자신에게 쏟아 부었다. 얼굴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슬픔, 죄책감, 자괴감 같은 것들이 뒤죽박죽 뒤섞인 하나의 감정이 흘러 내렸다. 하염없이, 하염없이.

 

“네가 나의 정인[情人]이 되어야지. 사가루”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주며 작게 속삭였다. 뒤엉킨 감정 따위들을 없애주는 뜻밖의

한 마디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가져다주었다. 연신 미안하다며 호시노를 안았다. 첫 만남의 시작이 되었던 장소는, 인연을 만들어 주었고, 사랑을 가져다주었다.

 

감당하기 힘든 상처는 존재하지만, 감당하기 힘든 행복은 없다. 이런 행복은 상처들을 무뎌지게 만든다. 별빛들의 축복을 받으며 이루어진 연인은, 성숙해져간다. 강바람에 치맛자락이 흩날린다. 이전의 상처, 고민, 죄책감도 함께 날아가 버리기를 기원하며, 사랑의 증표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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