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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예쁜 벚꽃이 하늘하늘 피던 날, 자기와 비슷한 신장의 남자아이가 말했다.

 

“나, 꼭 너에게 어울리는 예쁜 옷을 만들어 줄 거야”

 

여자아이는 붉은 매화보다 더 고운 빛으로 빛나는 남자아이의 뺨이 무척이나 탐스럽고 귀여워 보였다. 여자아이는 남자아이의 물음에 고운 빛의 치맛자락을 바다같이 넘실 움직여 가까이 다가갔다. 하얗게 빛나는 손이 뜨거운 다섯 꽃잎의 손을 잡으니 그것이 놀라 움츠러들었다. 저와 같이 작고 부드러운 손길은 덜덜 떨리며 누구의 떨림일지도 모를 온기조차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어째서?”

 

여자아이의 질문에 남자아이의 뺨은 더욱 붉어지니, 함께 눈을 살짝 돌렸다. 머뭇거리며 고민을 하며 입을 더듬다 눈을 질끈 감더니 은연하게 달빛을 담은 은색의 눈동자는 그 앞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여자아이는 그 눈동자를 바라보며

 

‘아아, 정말 예쁜 은구슬이다.’

 

라고 생각했다.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색깔.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색일 것이었다. 그런 그 아이가 자기에게 무언가 말을 하며 입을 움직이고 있지만 그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목소리를 채 다 듣기도 전에 보기도 전에 주변이 일그러지고 어둠으로 조각이 나며

 

꿈에서 깨어나고 말았다.

 

 

 

1.

익숙한 천장의 모습에 아련한 먼 옛날의 기억에 하얀 속옷을 덮은 몸은 아직도 꿈결에 허우적대고 있었지만 곧 들려오는 또 다른 목소리에 보랏빛 눈동자가 슬며시 그 쪽으로 또륵 굴러갔다. 문 너머는 태양의 빛을 받아 그림자만이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스인은 그 그림자를 보고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야? 피에타”

“일전의 나리께서 또 주인님을 찾으셔서..”

“그 분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이른 시간부터 나를 찾는 댑니까.”

“현재 정오시(12시 30분경)입니다.”

“아아..”

 

어쩐지 꿈이 너무 길더라니. 하며 작게 중얼거린 스인은 한 숨을 내쉬며 곧 나가겠다 전하라 말했다. 그 말에 문 너머에 있던 자는 물러가고, 스인은 피곤한 몸을 들어 이불 속에 나왔다. 높게 올라간 햇살의 뜨거운 비단이 하얀 속옷을 비추니 그림자가 은연하게 띠어 그대로 붉은 천에 감싸였다. 움직일 때마다 금빛 자수가 금의 장식과 같으니 마치 높고 지체 있으신 양반의 자제의 것인가 싶겠지만 그것은 전혀 아니라 말할 수 있겠다. ‘에스인’. 어딘가 이상한 느낌의 이름이라 느낄 수 있겠지만 어떠하겠는가. 그 이름을 갖고 태어난 것을. 그녀는 한양 어딘가의 땅에서 뿌리를 딛고 태어난 기방의 예인 중 하나이자 그 주인이다.

 

‘겉’으로는.

 

“또 이런 이른 시간에 들르셨습니까. 나으리”

 

잔잔한 정원에 커다란 돌담 아래의 연못. 자란지 얼마 안 된 나무들이 서로 얽히며 작은 숲을 만들어 내보지만 저 멀고 가까운 산에 비하면 초라한 행색과 다름없겠다. 그리고 그것은 연못 위의 돌 위에 아슬아슬 서서 연못을 내려다보는 위험하고도 난처한 나리와 저희들의 거리와도 같겠지.

 

“나리는 늘 저를 놀라게 하시는군요.”

“그야 그게 나의 매력 아니겠나?”

 

자칫 잘못하다간 발을 들어 올려 그대로 연못에 빠뜨리고 싶을 매력이었지만 붉은 입술을 그대로 꼬리를 올렸다.

 

“네, 그러하지요”

“아름다운 꽃은 늘 거짓말을 할 때 웃는구나.”

 

가볍게 내려와 사뿐사뿐 움직이는 발걸음은 비단의 도포를 뒤로하며 여인에게 다가가 곱고 거친 손으로 고개를 들어 올려 내려다보았다.

 

“저는 꽃이 아닙니다.”

“보통, 이 대사에 다들 기쁜 웃음을 짓기 마련인데..”

“그것은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모르거나 저항할 의지가 없을 뿐이지요. 꽃은 꽃이고 저는 저입니다. 아름답게 웃는 꽃을 원하신다면 화원이나 가보십시오. 아주 푹 빠지게 될 것입니다.”

 

제 턱을 올린 속을 밀치며 말을 하니, 나리라 불리는 남자는 그대로 작게 웃으며 저보다 한참 작은 여인을 폭 안으며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가볍고 무거운 숨이 들어와 나가니 목덜미가 간질거리고 무겁기만 하지만 스인은 더 이상 따로 말하지 않으며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내가 보고 싶지 않았느냐”

“어딘가 술에 빠져 논두렁에 코를 박지 않았나 하는 생각은 했습니다.”

“여전히 다정한 말은 해주지 않는구나.”

“.. 나리에겐 틈을 보이기 싫을 뿐입니다”

“그래? ..그거 무척 기쁘구나.”

“이제 그만 나와 주시지요. 무거워 어깨가 내려앉겠습니다.”

“내 이름.. 불러주면 나와 주마”

 

나리의 말에 스인은 좁고 널따란 품에 나오려 하지만 남자는 그대로 손을 깍지를 끼며 움직이지 않았다. 무거운 돌덩이도 이만큼 제멋대로이진 않을 텐데 생각하며 어깨를 밀어보지만 도통 움직이지 않으니 결국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도플라밍고. ..나리”“나리는 빼고”

“이 이상의 요구는 무리인 것, 아시잖습니까.”

“그래도..”

 

이 사람은 멋대로 안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강아지 같은 목소리로 애교를 부리는 걸까. 정말, 귀찮은 사내다. 하지만 이대로 있다간 정말 해가 저물고 달이 얼굴을 드러낼 때까지 요지부동 움직이지 않을 것이니. 스인은 그에 하는 수 없는 듯 고개 가까이 있는 도플라밍고의 귓가에 고개를 돌려 목소리를 속삭였다.

 

“도플라밍고. 빨리 나오지 않으면 새벽녘에 고이 수장시켜 드릴 겁니다.”

 

누가 들어도 신랄한 말투에 진심이 담겨 있다 할 수 있는 말투인데, 그 말을 듣고는 무엇이 마음에 들었는지 도플라밍고는 작게 훗훗 웃고는 따라 작은 귓가에 입술을 대어 말했다.

 

“너의 목소리는 어찌 들어도 주옥같구나.”

“하나도 기쁘지 않습니다. 이제 원하는 요구는 다 들어드렸으니 나오시지요.”

 

여전히 얼음과 같은 아이구나. 라고 도플라밍고가 말하지만 스인은 그에 걸맞게 냉정하고 단호하게 품에 나와 반걸음 뒤로 물러나며 도플라밍고를 보았다.

 

“또 이런 농을 시면 화를 낼 겁니다. 나리”

“너와 가까워지고 싶어서 그런 것인데..”

“저와 가까워지고 싶으면 그 가슴에 품고 있는 감정을 지우고 오십시오. 그렇다면 손님으로선 대해 드릴 수 있습니다.”

 

진시황의 만리장성도 저만큼 단단하고 넘어가기 힘들 까.

 

“사람이 가슴에 감정을 품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지우는 것 또한 얼마나 괴로운 지 너는 아느냐”

 

애달픈 깊은 목소리가 다가갈 수 있는 장소는

 

“모릅니다.”

 

어디에도 없었다.

 

 

 

2.

슥-. 슥-.

붉은 천을 찌르고 나오고 찌르고 나오는 바늘의 고통을 인내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하나를 찌르면 또 하나를 눌러 찌르고 날카로운 끝이 들어가면 또 다시 들여 넣어야 한다. 무한과 같은 반복과 고통의 속을 이 넓고 휑한 공간이 그것을 잘 표현해주고 있었으나 정작 본인은 그것을 신경도 쓰지 않으며 하나에만 집중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렇게 누군가가 들어왔어도 눈치 채지 못하는 거겠지. 왕과 왕족의 옷을 만드는 공간. 웬만히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장소이며 특히나 지금은 단 한 사람을 제외한 장인이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며칠을 밤을 샌 걸까. 눈 밑에 천천히 내려오는 그을음은 상당히 얼굴을 초췌해 보이게 하지만 상당한 미형이다 보니 저 그늘도 꽤나 어울린다 생각하는 여인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 이전에 있던 마을에도 상당히 그러했으니 과연 어떠할까. 본인은 마냥 모르겠지만. 상상에 작게 큭큭거리며 웃자 아주 잠시 바느질 소리가 멈추어 고개를 들었다. 바로 웃던 자의 얼굴을 확인한 장인은 다시 고개를 내리더니 이전과 다름없는 속도로 바느질을 반복했다. 그대로 자길 무시하며 일을 진행하는 모습을 보니 과연 장인이라고 해야 할까, 살짝 머쓱한 듯 소리없이 웃더니 그래도 옆에 앉아 말했다.

 

“세자저하의 용포는 언제 완성될 것 같아?”

“글쎄, 한 달 꼬박 새도 모자를 것 같아”

 

목석과 같은 움직임과 딱딱한 목소리에 피로가 물든 것은 어쩔 수 없으려나. 어째 나 때문에 고생하는 것 같아 미안해. 라고 무관인 남자가 중얼거리며 말하자 값비싼 금실을 수를 부리듯 움직이던 손은 멈추었다.

 

“아니, 저잣거리에만 일하던 일개 장인에게 이런 커다란 기회를 준 건 당신이니까. 힘들지만 이것만 끝내면 나는 지휘와 명성을 얻을 수 있으니 충분히 감사하고 있어. 코라손”

“둘만 있을 땐 ‘형’이라고 불러도 된다니까”

“그럴 순 없지. 엄연히 위치가 있는데”

 

그렇게 말하면서 말을 놓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도 되는 걸까.

 

“그러지 말고~. 로우-?”

“안 되는 건 안 돼. 형님”

 

장난스럽게 웃으며 주고받는 짤막한 대화에 잠시 굳던 얼굴이 풀어지니 그만 날카로운 바늘이 손가락을 찔러 놀랬다. 찔린 본인보다 더 놀란 코라손은 괜찮나 호들갑을 떨지 만 로우는 피가 안 나서 괜찮다고 말하며 어디 더러워진 곳은 없나 옷감 구석구석 보았다. 행여나 작은 바늘 구멍마저 벌어지진 않았는지 하면서 말이다. 새삼 무섭다고 해야 할까 대단하다 말해야 할까.

 

“혹시, 특별이 따로 먹고 싶은 것 없어?”

“?”

“물론 궁의 음식도 괜찮겠지만 혹시나 따로.. 아니. 아니야.”

 

정말 저 사람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싶은 로우의 표정에 로시난테는 점점 말수가 줄어 그냥 얼버무렸다. 듣던 본인은 그저 잠이 부족에 잘 듣지 못해서 살짝 찌푸린 것이었지만 따로 말할 기운이 없어 그냥 그러려니 서로 넘어갔다. 로우는 다시 눈을 감아 거친 수염을 살짝 긁적이더니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고 싶은 것?’

 

인가. 하고 속에서 질문이 바뀌었을 때. 로우는 순간 흐린 시야에서도 생각나는 누군가가 선명히 떠올랐다. 궁에 온 이후로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여인의 생각에 로우는 잠시 깊게 생각이 빠지더니 이제 슬슬 바깥일로 나가야 한다는 로시난테의 옷자락을 덥석 잡아 쥐었다. 그러다 그만 그 균형에 못 이긴 로시난테는 딱딱한 돌바닥에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어버렸다. 소리 없는 비명이 가득 울리자 로우는 그때야 멀쩡한 정신을 차리며 미안하다 사과를 하고 엉덩이를 찧은 로시난테는 그렁그렁 눈물을 맺으면서 오히려 뭐 하고 싶은 것이 생각이 난거냐 물어봤다. 그러자 굳게 닫혔던 입술이 열리더니, 유일하게 혈색이 돌기 시작하며 생기가 넘치는 목소리를 로시난테는 들을 수 있었다.

 

“누구에게 편지를 전해줬으면 좋겠어. 답장도 받으면 좋겠고..”

 

지금 본인이 얼마나 차분하며 들떠 보이는지 알고 있을까. 로시난테는 그만 작게 소리를 내며 웃고 말았다. 왜 웃는 것인가 모를 로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너도 그런 표정을 지을 때도 있구나 하는 답변이 들려오자 아무것도 아니라는 음성이 손가락 사이에 새어나왔다.

 

이후,

 

새하얀 종이에 먹이 조용히 스며들더니

글쓴이의 마음을 점점 새겨갔다.

 

 

 

3.

시끌벅적 활기가 도는 시장은 휑한 궁궐과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당연하기도 하고 새삼스럽기도 하겠지만 기름에 지지는 음식의 소리나 싸다고 물건을 파는 상인들의 목소리나 좁아터진 길을 잘도 기어 다니는 강아지의 모습이

 

“악!! 거, 좀 앞 좀 보고 다니쇼!”

“죄. 죄송합니다!”

 

자기와는 정 반대였다.

 

로시난테는 급히 지게를 진 상인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를 하다 급히 옆의 샛길로 몸을 비집고 들어갔다. 겨우 숨통이 트이는 거리의 한가함에 피로가 한 번에 밀려왔다. 천성의 덜렁거림은 역시나 관객을(뒤따라온 강아지를) 실망시키지 않으며, 겨우 몇 걸음을 걷지도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나자빠져 버렸다. 괜히 밖으로 나왔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하지만 세자를 잡아 오라는 명령과 로우의 부탁이 있으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 기방의 누군가에게 빠져 하루하루 방탕하게 노는 세자를 잡아오라니, 누군가는 목이 간당간당해 절대 받을 수 없는 명령이겠지만. 그 본인, 로시난테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이 사실을 아는 이도 왕 하나 뿐. 하지만 궁에서는 서로 반신반의하며 소곤거리는 속삭임.

 

로시난테는, 세자의 동생이다.

 

“앗. 이런, 그렇게 옷자락을 물어도 먹을 건 없다고?”

 

라고는 해도 성격이나 자질이나 행동의 하나하나가 너무 달라 그저 입소문에 불과하게 됐지만, 진상을 말하자면 ‘사실’임이 틀림없다.

 

“음..떠돌이 치고는 좀 말끔한 것 같은데?”

 

제일 먼저 사람에게 다가오고 꼬리를 치는 것이 꽤나 누군가에게 키워지며 사람을 탄 것 같았다. 짤막한 꼬리가 흔들흔들 흔들리는 것이 무척이나 귀엽지만 궁에는 데려갈 수 없으니 정이나 붙이지 말자 생각하며 매몰차게 뒤돌아갔다. 그러자 갈색의 강아지는 짧은 다리를 가볍게 흔들며 로시난테의 곁을 함께 걸었다. 빨리 가면 같이 빨리 달리고 갑자기 속도를 멈추면 저도 슬슬 속도를 줄여 걸음을 맞춘다. 애초에 개랑 달리기 시합을 한다면 인간이 지는 것이 뻔-한 승부이것만. 어쩐지 오기가 생긴 로시난테와 강아지는 서로 눈을 마주치니 이윽고 달리기 시합이 시작됐다.

 

결국, 로시난테는 중천에 올라가던 해가 산 너머로 넘어간 뒤에야 기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아..이거 어떡하지”

 

개랑 싸우다 길을 잃어 겨우 도착한 기방은 이미 영업을 시작하고 있는 상태였다. 안은 여인과 사내들이 서로 모이며 잔치를 벌이고 있었고, 정문 주변은 짝을 지은 이들이 서로 문을 막고 있으니 난감할 따름이었다. 그냥 편지를 넘겨주고 오면 되는 일인데 행여나 붙잡히진 않을까(이미 그런 경험이 많이 있었다). 엄연히 무관의 높은 신분이기도 한 지라 이런 곳에 오래 있을 순 없는 일이었다.

 

‘세자전하도 빨리 찾아야 하는데..’

 

고민의 끝에 혹여 후문이 있지 않을까 도둑고양이 마냥 뒤를 향해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갔다. 분명 이쯤이면 있을 텐데 하고 고개를 기웃거리자 인기척이 없는 곳에 차가운 작은 문이 두터운 벽과 함께 자리 잡고 있었다. 이미 해가 산 너머로 들어가서 일까. 작은 문은 마치 차가운 얼음으로 만들어 쉽사리 열리지 않을 얼음벽과 같았다. 애초에 인기척도 없으니 누가 열어줄 수나 있을까. 미처 생각도 못한 것을 생각해내니 괜한 헛걸음을 한 걸까 좌절하는 사이, 작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열리는 소리에 급히 별 뒤로 몸을 숨긴 로시난테는 다시 고개를 슬쩍 꺼내여 문이 열리는 쪽을 훔쳐보았다. 빛이 얼마 없어 사람을 인식하기에 힘이 들었지만 단 한 사람, 유난히 몸집이 크고 익숙한 도포에 슬쩍 달빛에 보이는 눈동자가 보이더니 로시난테는 그 사내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전하..?’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기방에서 몰래 뒷문으로 나오자 로시난테는 입을 뻐끔거리며 할 말을 잊었다. 남녀 둘 사이의 예사롭지 않은 진한 애정의 표현에(주로 세자 쪽에) 함부로 나서지 못하면서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둘의 사랑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에 결국 실증이 난 것인지 여인의 매몰찬 행동에 도플라밍고는 하는 수 없는 눈을 갖더니 그럼 내일 보자며 여인의 뺨에 뽀뽀를 하더니 곧 뒤돌아 돌아갔다. 다른 누가 그 장면만을 본다면 연인 사이의 애틋한 헤어짐으로 보이겠지만 곧 입맞춤을 받은 자리를 손으로 닦아내는 여인의 행동을 보자니 그저 일뿐인 관계임을 어리짐작 할 수 있었다.

 

“누구신데 뒤에서 이리 훔쳐보는 겁니까?”

“으아아악?!?!”

 

뒤에서, 그것도 귓가에서 낮은 음성의 목소리가 들리자 긴장하던 로시난테는 그만 소리를 질러 급히 뒤돌아봤다. 뒤에서는 하얀 백은의 머리칽을 가진 남자가 긴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고운 사내가 수상한 인물을 바라보듯 노려보고 있었다. 그냥 보아도 곱게 바라보는 것이 아닌 것을 알 것 같은 표정이었다.

 

“무슨 일이야?”

“이 자가 자꾸 뒤에서 주인님을 훔쳐보고 있었습니다. 아시는 분입니까?”

“아니? 이 손님은 처음 보는 얼굴인데?”

“죽일까요?”

 

숨겼던 작은 칼을 꺼내 저보다 커다란 사내의 목을 서슴없이 노리니 서늘한 감촉이 목숨의 위험을 절로 감지해주었다. 오돌오돌 떠오르는 소름이 상당히 오랜만에 맛보는 위험이었다. 피가 거꾸로 내려가 눈앞의 차가운 제비꽃의 색 마저 보이니 로시난테는 작고 크게 소리치며 말했다.

 

“훔쳐보고 싶어서 훔쳐본 게 아니야! 염탐도 아니고!”

“그럼, 왜 몰래 보고 있었던 것이죠?”

 

여인이 말하자 속으로 그게 그거 아닌가 생각했지만 급히 넘어갔다.

 

“난..‘에스인’이라는 월하의 기방의 여인을 찾고 있었습니다.

로우에게 부탁을 받아 편지를 전해주기 위해..”

 

음? 순간 잘못 본 것인가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헛 걸 본 것이 아니었고, 아무리 사람눈치 보는 것이 둔한 저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아아, 정말 서로 닮았구나 싶을 정도로.

 

‘로우’의 이름이 나온 순간 에스인이란 여인의 얼굴은 누구나 알아볼 정도로 애절하고 그리운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붉혀갔다.

 

“피에타, 빨리 단도를 내려 놔! 이 분은 중요한 손님이야!”

 

스인의 명령에 뒤에 칼을 쥐고 있던 피에타는 로시난테에게만 들리게 작게 ‘칫’하고 혀를 차더니 슬슬 손을 내려 칼집에 도로 내려넣었다. 그 소리를 듣지 못한 스인은 그저 실례를 범했다고 급히 사과를 하더니 ‘안쪽으로 드시지요’하며 로시난테를 안내했다. 작은 문으로 들어오기란 조금 힘이 들었지만 그래도 고개를 한 번 숙이고 들어 올리니 작은 방 하나하나가 밝은 불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웃음소리에는 가식이 숨겨져 있었고, 화려한 그림자의 춤사위는 누군가를 유혹하고 있었다. 이런 기방의 주인이라니. 로시난테는 새삼 로우가 살짝 걱정되었지만 그래도 좀 전에 보았던 그 표정이라면 분명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이어 생각했다. 매끈한 결의 복도를 지나 최상층의 커다란 방에 도착했다. 주인의 자리란 것이 보였다. 시끄러운 호롱 불 위에 군림하는 주인의 자리.

 

“앉으시지요.”

 

뒤따라온 피에타가 미리 앞서 자리를 마련해주니 로시난테는 방석 위에 조심스럽게 앉아 흘긋 눈을 돌리며 주변을 관찰했다. 꽃과 나비가 어우러진 두루마리하며 가지런히 놓인 화병이나 깔끔하게 쌓인 너덜한 책들은 여인이 얼마나 책을 좋아하며 읽는지 알 수 있었다. 로시난테는 만약 이 자가 양반의 가문에 태어났다면 분명 하나 크게 했을 느낌을 무의식에 받을 수 있었다.

 

“차는 수국의 차로 괜찮겠습니까?”

“아, 네. 아무 거라도 괜찮습니다.”

“그런가요. 그러나 다른 곳에선 그런 대답은 피하시는 게 좋으실 겁니다.”

“네?”

“어설픈 대답만큼 독이 되는 것도 없을 테니까.”

 

대체 어떤 경험에서 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걸까. 순간 방 안의 기운이 차갑게 내려가는 것 마냥 서늘해졌지만 작은 잔에 헤엄치는 자그마한 잉어와 위에 동동 뜨는 자그마한 수국의 꽃이 보이니 절로 따스한 온기에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무척, 예쁘군요.”

“네에. 특별히 제작을 부탁하여 만든 것이니 당연하지요”

 

후륵. 하아-..

작은 숨으로 한 모금 마시니 그 온기는 더욱 진하게 흘러내렸다.

 

“자, 이제 그만 주시겠습니까.”

“네?”

“편지를. 주시겠습니까?”

“아, 맞다. 그게 바로 여기에..앗 뜨..!!”

 

텅. 덜그렁. 도르르륵. 찻잔이 떨어져 바닥에 내용물이 모두 쏟아져 흩어지니 순간 주변이 고요해졌다. 아차. 중요한 잔이라 했는데! 하는 생각에 로시난테는 급히 떨어진 잔을 들어 올려 탁자 위에 올렸다. 하지만 정작 그 소중한 잔의 주인은 그것이 깨졌건 말건 로시난테가 가져온 편지가 어디 번지지 않았는지 소중이 고이 손에 모으며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보다, 언제 가져간 거지?!’

 

분명 꺼내려던 것은 한 순간에 불과했건만.

 

“아아.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이어 들려오는 스인의 목소리에 로시난테는 의문이나 호기심은 찻잎과 함께 푹 젖어 녹아들었다.

 

보면 볼수록, 너와 저 여인은 정말 닮았구나.

 

하며 그와 함께 궁에서 바늘을 놀리고 있을 로우가 생각났다. 서로가 소중에 안달이 난 사람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으니 도리어 본인이 잘못한 기분까지 들어버렸다. 그리고 명을 받아 일을 하게 된 로우의 목적 또한 알 수 있었다.

 

‘다 저 사람을 위해서였구나.’

 

어설프도록 서투른 서로에 대한 표현에 새삼 웃음이 절로 띠었다.

 

“...”

 

하지만 그것은 얼마 오래가지 못했다.

 

“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무엇인가요?”

 

과연 물어보는 것이 나을까 묻지 않는 것이 좋을까. 그냥 아무것도 모르게 흘러가게 하는 것이 맞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분명 방금 전에 보았던 그 모든 행동들 하나하나로 보건데 결코 흘려 넘길 수 없는 일일 것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방금 전, 함께 있던 그 사내 말입니다..”

“아아, 세자 저하 말입니까?”

“!!??? 아..알고 있었습니까!?”

“네, 그리고 당신께선 그 저하의 동생님인 것도 알고 있지요”

“어..어떻..”

 

금방이라도 새파랗게 변한 얼굴과 함께 기절할 것만 같은 로시난테의 표정을 보자 스인은 작게 한숨을 쉬며 편지를 곱게 접어 말했다.

 

“저는 이래 뵈도 꽤나 정보에 능한 사람입니다. 그것도, ‘꽤나’말이지요. 그래서 그 쪽의 형님이신 도플라밍고 세자 저하께서도 저를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다짜고짜 자신에게 득이 될 정보를 넘기라는 말을 한 것이 무척이나 기가 찼지만 작은 정보를 넘겨줄 터이니 세자 저하의 흥미로운 정보 하나 넘겨 달라 하니 그 쪽을 넘겨주더이다. 허나, 그대의 정보를 어딘가에 흘리면 오히려 죽는 것이 나일 터이니 함부로 흘리고 다니진 않았습니다. 그래야 이 ‘정보’란 것의 희소성이 넘친 테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 이 장소에서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하니 로시난테는 그저 멍한 표정을 지으며 스인의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세자 저하는 제가 넘기신 정보로 한 건 해결을 하시더니 더욱 저에게 접근을 하며 해정을 표현하시더군요. 물론 저는 더 이상 높으신 분들의 싸움에 끼어들고 싶진 않았지만 이미 궁궐로 들어 가버린 로우를 위해서도 그 분을 가까이에 두는 것이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아무리 무례하게 시간의 상관없이 밤낮에 불쑥불쑥 찾아와도 아무 말 없이 받아주었지요. 그러던 사이 로시난테 무관님에 대해서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었고..

 

..세자 저하의 감정 또한 변해가는 것을 직접 느낄 수 있었지요.”

 

제가 무관님의 이야기에 흥미로워하니 세자의 얼굴이 점점 굳어져만 갔었습니다. 라고 상상도 못하는 이야기가 이어서 흘러나오니 로시난테는 제 정신을 어떻게 둬야 할지 모르며 새로 담긴 뜨거운 차를 홀짝 입안에 털어 넣더니 그만 그대로 뿜고 말았다.

 

“그 분이 왜 저를 좋아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흥미겠지요. 그러니 동생이신 당신께서 말하면 들어주진 않을까요?

 

짝은 서로 어울리는 신분이 좋을 것이라고”

 

 

..

사람 소리가 들썩이는 기방을 뒤로하고 나온 로시난테는 고요한 골목에서 답장을 받은 편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삽시간에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들을 들어서 인 것도 있었지만 스인에게서 듣던 한 마디가 철근같이 마음을 짓눌러 편한 표정을 짓지 못했다.

 

‘동생인 나’

 

라니.

세자와 일개 무관으로서 서로 떨어졌던 세월만 상당한데 과연 그 제멋대로의 도플라밍고 세자 전하가 자기 말을 들어줄까?

 

‘얼토당토않지..’

 

새삼스러 관계 확인에 허탈한 쓴 웃음만 지으며 고운 비단에 감싸인 편지를 보았다. 붉은 천에 수놓아진 작은 자수의 주인은 어쩐지 기방의 주인이란 생각이 절로 들 수 있었다. 그 주인의 눈동자의 색인 제비꽃과 로우의 눈동자 색과 같은 나비라니. 속으로 이렇게 감추면서 감추지 않는 관계가 새삼 웃겨 작게 풋 하고 웃음을 내쉬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냐?”

 

돌아가서 로우에게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줘야지.

분명 오늘 있던 이야기를 들으면 로우도 좋아할 거야.

 

“..세자..전하”

“둘만 있을 땐 형 이라고 불러도 된다 했지 않았나?”

“...”

 

그러나 그 생각은 생화가 시들어 마지막 잔향을 남기는 것만큼 힘들었다.

 

“왜 이래-. 그렇게 서로 멀어지면 형은 쓸쓸해진다고?”

“그.., 아니야. 그냥 세자전하라고 부른 시간이 너무 길어서 그랬어..”

“흠.. ..그래. 그래서?”

“어?”

 

토닥토닥. 마치 동네에 놀다 돌아온 아이의 어깨를 다독여주듯.

사뿐히 무겁게 툭툭 두드리는 다독임은,

 

“기방에서 대체 스인과 무슨 이야기를 한 거지?”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거미의 독으로 녹아내렸다.

 

 

 

4.

처음 이 곳에 오게 된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의 욕심에 의해서 였다.

 

“하아.. ..죽겠군.”

 

무언가에 의해 최고가 되고 싶다는 욕심. 그로 인해 명성을 얻고 싶다는 욕심. 그리고 그 무엇보다, 자신이 사랑하는 이에게 최고의 옷을 만들어 주고 싶다는 욕심. 순 욕심뿐이라고. 누군가는 분수에도 안 맞는 짓을 한다며 비웃음을 짓겠지만 이미 자기에게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이가 저를 응원해주는데 주변의 냉소는 알바일까. 하지만 역시 조금은 버거운지 어깨가 굳거나 눈이 마르거나 모르는 사이 기절해 잠에 빠지거나 하는 일이 일상다반사였다. 뭐, 덕분에 예정보다 더 빠르게 완성시킬 수 있겠지만. 그렇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거대한 막대기에 걸린 용포를 보며 로우는 세세한 곳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마무리만 하면 된다..’

 

그러면 이제 널 다시 만날 수 있어.

 

‘분명 왜 이제 왔냐고 너는 화를 내겠지.’

 

이미 상상이 되는 그 모습에 로우는 작게 큭큭거리며 웃음을 흘러냈다. 어린 시절부터, 스인과 로우는 늘 함께 자라왔다. 집이 가까운 탓도 있었지만 이미 서로에 대한 마음이 향할 곳을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고운 매화꽃이 어울리는 한가한 마을에서 서로 웃고 뛰놀며 사사로운 일들 하나하나 서로와 함께 경험해왔다. 이웃 마을의 못된 녀석들과 싸울 때나 글자 하나하나 배울 때나. 작은 일에 토라져 얼굴을 보지 않고 살아올 때나 서로의 질투에 화가 나 눈물을 흘릴 때나. 성인이 돼 서로 가야할 길이 너무나 달라 만나선 안 될 때나..

 

그 아이는 기방의 주인이 되어야만 했고, 자신은 옷을 만드는 장인이 되어야 했다.

 

사는 세계가 틀리다는 어른들의 말이 다 자라서야 깨닫고 만 자신은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다. 스인은, 기방의 주인이자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방대한 세상의 지식(상당히 위험한 거래의 진상들)이란 자산에 늘 보이지 않는 위험에 도사리고 있었다. 그것을 알 수 있게 된 것은 오래 전, 우연히 스쳐 지나간 ‘어느 사내’의 말 덕분이었다.

 

그로 인해 이런 어울리지도 않는 일을 받아 목숨을 걸고 일을 할 수 있게 된 거지만.

 

‘실패도, 어설픔도 용서하지 않아’

 

그래도 하겠어?

 

저를 걱정하는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궁을 들어오기 전, 로우는 작은 공방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공방에 늘상은 아니어도 심심할 때면 얼굴을 비추는, 몇 년은 알게 된 로시난테는 걱정스레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한다고 했잖아. 자기가 제안을 했으면서 뭘 그리 걱정이 많아?”

 

슥슥. 실이 들어가고 나오는 소리가 유달리 흔들리며 울려갔다.

 

“조금이라도 잘못 되면, 죽으니까 하는 소리지”

“아아, 그래?”

 

겨우 감상이 그것뿐이야?! 라고 커다란 소리로 놀라는 로시난테의 말에 로우는 담담히 말했다.

 

“그런 위험도 없으면 난 그 사람에게 다가갈 수 없는 걸”

“응?”

“뭐어, 형님하곤 상관없는 일이야.”

“에에?? 뭔데? 대체 뭐기에 그런 거야?”

 

작게 중얼거린 목소리가 신경 쓰인 로시난테는 궁금해 죽겠다며 로우의 어깨를 쥐어 흔들다 이마에 바늘이 살짝 따끔하게 꽂히고 말았다. 예상 못한 공격에 로시난테는 이마를 문지르며 옛날이랑 많이 달라졌다며 글썽이며 투덜거렸다. 그 말에 로우는 딱히 옛날이라고 그렇게 살갑게 대하진 않았는데? 라고 무덤하게 답했다.

 

‘아아..언제 오는 거지’

 

새삼 궁에 들어오기 전을 생각하니 빨리 와야 할 얼굴이 보이지 않아 멍하니 공허한 작업장 내부를 보며 고개를 옆으로 떨궜다. 편지는 잘 전해줬을까. 혹여 잊어버리진 않았을까. 오다가 넘어지진 않았을까. 그러다 답장 받은 편지가 찢어지진 않았을까. 온갖 안 좋은 결과만 생각이 나니 창으로 내려오는 빛의 움직임이 변할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리고 그런 창 밖에서 유일하게 들려오던 참새의 지저귐이 사람의 목소리로 변하는 순간, 요사스러운 속삭임이 귀에 흘러 들려왔다.

 

“얘, 그거 들었어?”

“아아, 그거 말이지? 당연한 거 아니야? 지금 그것 때문에 궁 안이 소란스러운 거잖아”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뭐, 오랜 세월 궁에 생활한 자들이니 별거 아닌 일에 호들갑을 떨고 있는 거겠지. 더군다나 궁녀의 귀에 들어간 이야기니 그렇게 중요한 이야깃거리 이겠나 생각하며 하품을 하다.

 

“세자 전하께서 기생을 부인으로 들기 위해 궁으로 억지로 데려왔대”

 

그만 숨이 턱 막혔다.

쿨럭쿨럭.

 

별채에 누군가 작게 기침을 하자 밖에 지나던 궁녀들은 급히 발을 저리로 옮겨갔다. 저게 대체 무슨 소문일까. 하니, 기생이 한둘이 아니니 분명 아니겠지. 아닐 거야. 그래. 분명 빼어난 기생들도 한껏 있으니 분명 그 사람이 아닐 것이야.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떨쳐보아도 몰려오는 불안에 오랜 시간 굽어진 손가락이 덜덜 떨리기만 했다. 재빨리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냥 다른 사람이겠거니 생각하며 다시 일에 몰두하려 바늘의 구멍에 실을 꽂았다. 건너편으로 쭉 늘려 나오는 실은 그대로 늘어져 아래를 향해 축 내려앉았다. 제발, 그냥 기분 탓이길.

 

덜컹.

 

“..형?”

“로우..”

 

나 참. 왜 이제야 온 것인가. 물어볼 것이 많고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던 얼굴이 보이자 로우는 겨우 희미하게나마 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일 초의 찰나도 허락하지 않았고, 곧이어 보이는 한 얼굴에 숨결에 꺼지는 양초의 불꽃마냥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흐음- 네가 그 트라팔가 로우인가?”

 

자신에게, 그 사람의 이면을 알려주었던 그 남자.

 

“과연, 이렇게 엮이는 것도 참 기구하고 재미있지 않나. 로시난테?”

“네..세자전하”

 

스쳐지나가던 그 모습을 이렇게 또렷이 보여주는 현실을

어떻게 원망하면 좋을까.

 

 

 

5.

설마하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날이 또 어디 있을까.

해가 떨어지고 별들이 하늘에 끊임없이 수놓으니 가히 장관이라 할 수 있었지만 딱히 그 모습을 보더라도 어떤 감흥도 느껴지지 않은 이도 있었다.

 

“하아..그렇게 조심하고 또 조심했건만.”

 

스인은 과거 나날에 자신이 대체 무엇을 어떻게 잘못했는지 되돌아보지만 갑작스러운 세자의 돌발행동에 상당히 골이 죄여왔다. 대체 어디서부터 틀어진 걸까. 그렇게 조심스럽게 대했는데 무엇에 심산이 뒤틀렸던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나오지 않는 답변에 결국 깊은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런 스인의 앞에 앉아있던 로시난테가 작게 고개를 숙여 말했다.

 

“아뇨. 잘못은 도플라밍고가 한 것이지요.

그 사람의 동생이라고 해서 연대책임을 물을 생각은 없으니 그 쪽도 긴장 푸세요.”

 

하지만 숙인 고개는 다시 들을 줄 모르며 그대로 풀이 죽어 있었다. 사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자신이 형에게 편지를 들키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 사실을 말도 하지 못하며 그저 함묵을 할 수 밖에 없는 로시난테는 당시 도플라밍고의 ‘어떤 것도 그 분에게 발설하지 마라’라는 명령을 다시 되새기며 눈을 꾹 감아 뜨였다.

 

“스인님. 당신은..형님이 왜 당신에게 집착을 하는 지 아십니까?”

 

어떤 마음에서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

새삼스러운 질문에 보랏빛 눈동자는 잠시 흘긋 곁눈질을 하더니 곧 돌려내 말했다.

 

“글쎄요”

 

작게 픽 웃는 웃음은

 

“본인만이 알겠지요,”

 

무엇을 생각하며 나오는 것일까. 서로 마음에도 없는 질문과 대답에 잠시 가야할 곳을 잃더니 스인은 고개를 숙이던 로시난테의 목을 들어 올리게 하며 도플라밍고와 같은 색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것보다. 로우가 있는 곳, 알려주시겠어요?”

 

 

 

6.

호롱불도 없는 별채에,

가는 바늘이 유일하게 색을 띠고 있었다.

 

그것을 내려다보는 은색의 눈빛은 퇴색 되어 죽어가고 있었고, 목은 거북이같이 아래로 축 늘어뜨리니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에 누구나 발길을 돌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점점 다가가는 발자국은 점점 소리가 커짐에도 로우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작은 바늘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고 있어도 괜찮은 거야?”

 

포옥 다가오는 누군가의 품이 익숙한 향기와 함께 다가오니,

그와 함께 감싸는 가느다란 팔에 그대로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이미 다 완성했으니까”

“한 번 더 안 봐도 괜찮아?”

“응. 이젠 됐어. ..이젠”

 

서로 두 눈을 감으며 닿을 듯 말 듯 미세하게 느껴지는 체온에 더 이상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나 그리웠던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니었지만 마치 천백 년이나 떨어져 겨우 만난 사이인 것 마냥 서로 더 이상 떨어지지도 놓아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서로의 작은 호흡을 느끼며, 미세 히 떨리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이대로 그만 잠이 들고 싶었다.

 

“.. ..어릴 때, 로우는 늘 신경질 적이었지?”

“아아.. 그래. 너도 마찬가지였고”

“게다가 엄청나게 사람 기분도 못 맞췄고”

“누구씨도 그랬었지”

 

서로 옛날이야기를 꽃피우며 평화롭게 노닐던 때가 그리운 듯 서로의 목소리에 향수가 느껴졌다. 서로에 대한 험담으로 느껴지는가 한편 서로밖에 모르는 버릇이나 본인도 알지 못했던 일들이 나오자 작게 웃음꽃을 피우며 계속해서 이어갔다.

 

“로우. 로우가 처음으로 나에게 만들어 준 옷, 이젠 맞지 않는다?”

“그야, 10년도 지났으니까 ..그렇겠지.”

“..또. 만들어 줄 거지?”

 

오랜 세월 일을 해온 손은 저보다 커다랗고, 작은 굳은살이 박혀있었다.

 

“그래.. 절대로 누구도 널 가벼이 보지 못하게.

..세자전하와 어울리도록 만들어줄게”

 

다정하게 커다란 손을 쓰다듬던 작은 손은, 더 이상 그것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놓아버렸다. 무엇을 말해야 할까.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하지만 이미 뱉어진 한 마디에 서로는 더 이상 어떤 말도 이을 수가 없었다. 여인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져만 가고, 사내의 얼굴은 점점 표정이 굳어만 갔다. 진심이냐 물으면 그렇다 하겠지. 정말 그럴 거냐 물으면 그렇다 말하겠다. 이미 현재 처해진 상황을 잘 알고 있고, 최악의 경우 어떻게 되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다른 누구보다

서로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 바보야”

 

 

 

7.

한 달 뒤. 이른 새벽 아침,

 

“어때?”

 

거의 반 죽어가는 목소리는 그대로 바닥을 기어가는 듯 보였다.

 

“굉장히.. 멋져. 아니, 정말 이렇게 멋진 옷은 또 처음이야.”

 

이미 몸의 절반은 바닥을 기고 있었지만. 바로 옆에 서있던 로시난테는 활짝 펴진 하늘의 사람이 입을 듯 화려한 한복을 보며 감탄을 멈출 수 없었다. 새하얀 배경에 수놓은 금빛의 새는 우아하게 하늘을 바라보며 그대로 날아갈 것 같았고, 작은 세공이 함께 자리 잡은 치마의 밑단은 단아하고 화려하게 처음 보는 신비한 문양으로 둘러싸여있었다.

 

분명 옷에 대해 모르는 누구나 봐도 보면 절로 감탄사가 나올 것이었다.

 

“.. ..정말. 로우 너나 그 사람이나 대단한 것 같아”

 

작게 중얼거리는 로시난테의 말에 로우는 피로에 지쳐 선명히 들을 순 없었다. 그냥 옷을 칭찬해주고 있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낮은 혈압의 몸을 겨우 일으켜 저가 완성한 옷을 보았다. 손가락 마디 사이에 보이는 그 옷을 보고 있노라니 스인이 입어 웃는 모습이 절로 상상을 하니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결국, 그날 밤 이후로 만나지 못했네.’

 

이 옷을 입은 모습은 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하지만 이미 쏟아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없듯이, 모든 걸 포기한 로우는 작게 한숨을 쉬어 차가운 돌바닥에 발을 내려놓았다.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발은 이대로 뿌리를 내리고 싶었다. 이 궁을 나선다면 분명 두 번 다신 만날 수 없게 되겠지. 지금이라도 당장 되돌아가서 붙잡고 도망갈 수 있을 것이다. 분명, 같이 따라 와주겠지.

 

너와 다시 만난 그 때였다면.

 

 

..

“정말. 만나지 않고 가도 돼?”

 

궁을 나가는 문 앞에서, 로시난테는 마지막으로 붙잡듯 물었다.

 

“응. 이제 갈게”

“그..그럼 정말 아무것도 안 받아도 괜찮아?”

“괜찮다니까”

 

유난히 평소보다 끈질 감이 있었지만 로우는 힘겹게 미세한 미소를 지으며 문 밖으로 다른 한 발도 넘었다. 눈이 시린 푸른 나무가 흐드러지듯 피어난 산에 붉은 금실이 하늘로 넓게 퍼져가니, 늘 보던 풍경도 또 다른 장관이나 다름없었다.

 

..

한걸음. 한 걸음을 옮기며 겨우 사람 걸음으로 꼬박 한나절을 채워 공방으로 도착했다. 이제야 숨을 돌릴 수 있던 로우는 그리운 의자의 먼지를 탈탈 털어내더니 그 위에 푹 앉았다. 익숙한 염료 향이나 비단실의 형형색색의 빛이나 시장에 울리는 소리하며.. 고요했던 궁궐과는 다르게 익숙히 다가오는 소리들이 하나같이 활기가 돋았다.

 

‘...’

 

그리고 곧 너의 목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았다. 아직 한 낮인데 일을 시작하지 않았냐고 타박을 주는, 그 한마디가. 이제 와 무엇을 바라냐고 또 누군가가 한 마디를 할 법도 하겠지만. 그냥,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러는 편이..

 

“아직도 일을 한 하는 거야?”

 

깜짝. 놀라는 눈동자가 급히 깜빡거리며 흔들렸다. 벽에 붙이던 등을 세워 목소리가 들린 공방 안쪽을 바라보니 궁에 나오기 전에 완성한 한복을 입은 스인이 저를 빤히 바라보며 서있었다. 살짝 눈살을 찌푸리다가도 세상만사 피로를 안은 한 숨을 깊이 내쉬더니 그대로 로우에게 다가가 살포시 입술을 포개었다.

 

“너무 나태한 것 아니야?”

“그야, ..아직 일이 없으니까.”

“뭐야, 그 얼굴은. 마치 귀신이라도 보는 표정이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지..”

 

평정을 유지하던 얼굴은 결국 점점 더 일그러지더니 뜨거운 열이 오르며 얼굴이 붉게 익어갔다.

 

“그런 얼굴을 할 거면서, 나를 떼어놓고 했던 거야?”

 

놀리는 목소리와 달리, 여인 또한 마찬가지로 점점 일그러진 얼굴을 붉게 물들이더니 몰려오는 참아온 인내와 화에 결국 분에 못 이겨 눈물을 구슬피 쏟아냈다.

 

아아, 결국 후회에 휩싸이게 되지만.

 

“이런 꿈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0.

“나더러, 선택하라. ..고?”

“네. 세자 전하께서 무엇을 선택하던 전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텅 빈 별채 안, 스인은 이미 사라지고 남겨진 유일한 옷을 보며 말했다. 새하얀 의복은 단아하며 아름다웠지만, 그만큼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전혀 다른 세상의 의복과 같았다.

 

“단, 전하께선 반드시 하나의 선택지만을 선택해야만 합니다.”

 

그런 옷을, 대체 어떤 마음으로 만들었을까.

 

“뭐, 좋아. 들어보긴 하지. 너는 언제나 나를 위해 움직여왔으니 말이야”

 

저만치 떨어져 있던 사람이 가까이 다가와 제 뺨을 조심스레 쓰다듬으니 스인은 그 손을 거절하지 않으며 그저 살포시 웃어 도플라밍고의 눈을 마주보았다.

 

“저는 전하를 위해서가 아닌, 언제나 저를 위해서 움직여왔습니다.”

 

저를 바라보는 눈동자를 보아도, 언제나 그 속에 있는 자신만을 바라보니.

 

“그로 인한 안일한 대처에 일이 이렇게 되고 말았지만..”

 

그것의 사랑스러움도 하나의 감정이리라.

 

“조금이라도 틈을 허락한 제 잘못이 크겠지요.”

“..나를 만난 것을 후회한단 것인가?”

“아뇨. 전하는 앞으로 저에게 있어 정말 커다란 힘이 되어주실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가 제안하는 것을 받아들일 경우의 이야기 이지요.”

 

두 손을 들어 겨우 닿는 거리는 상당히 가깝고도 멀게 만 느껴진다. 그러나 그 작은 손이 얼굴에 닿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니 도플라밍고는 그것을 애정이 아닌 사랑으로만 느끼고 싶었다.

 

“전하의 권력을 굳건히 시켜줄 정보를 넘겨드리겠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다면 분명 전하는 ‘왕’이 되실 것이고. 그 후에도 얼마동안은 권력을 유지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도플라밍고. 당신으로서 저를 선택을 하게 된다면 당신은 분명 얼마 가지 못해 세자의 직위를 박탈당하고 불순분자들에게 제거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자, 어느 쪽을 선택하실 건가요?”

 

지금 이 순간 바느질을 하던 녀석을 데려와 죽도록 고문을 한다면 당장에라도 그 입을 열지 않을까.

 

“너는 언제나, 나에게만 냉정하게 대하는 구나”

 

그러나 잠시라도 그 생각을 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아.

 

“그럴 수밖에 없는 자리에 앉아 계시고 있으신 겁니다. 전하”

 

너라는 사랑을 잃고 싶지 않아.

언제나 웃으며 서로를 속이고 속일 뿐인 관계라 해도,

 

“또, 그 곳으로 찾아가도 될까?”

“‘손님’으로서 오신다면. 언제든 환영해드리겠습니다.“

 

그대라는 사람이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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